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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이왕주
산골청년
[2013-01-07 14: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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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이왕주

꽤 오래전부터 내 영화 취향은 단순했다. 일명 ‘시원하게 때려 부수는 거’. 트랜스포머처럼 갑자기 자동차에서 변신한 로봇이 도시 하나를 때려 부수는 것도 좋았고, 배틀쉽처럼 골동품이 다된 퇴역 전함으로 강력한 외계 전함을 쳐부수는, 다소 허무맹랑한 영화도 꽤 재미있게 봤다.

영화 안의 픽션을 수용하기 위해, 현실에서라면 조금도 믿지 않을 영화 상 설정을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만 눈 감아 주는 것을 ‘불신의 유예’라고 한다는데, 내 경우에는 그 유예의 범위가 유달리 너그러웠던 것 같다.

부모님을 포함한 내 주변 지인들은 이런 내 취향을 신기해하면서도 재밌어 했었다. 어머니는 ‘그래, 책은 그렇게 시리어스한거만 골라 보더니 영화는 또 그런 거만 보는구나. 사람은 결국 균형이 맞게 돼 있다니까?’ 하며 날 놀리기 일쑤였으니까.

하지만 이 책을 읽고는 생각이 변했다. 어쩌면 난 ‘시원하게 때려부수는 것’을 애초애 좋아한 게 아니라, 영화가 줄 수 있는 감상이랄까하는 것은 고작해야 거기까지라는 무의식적 편견을 품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는 것. 맞다. 영화도 책과 같은 예술 작품이다. 작가가 온 힘을 펜 끝에 모아 자신의 질문을 작품위에 새겨 넣듯이,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배우들 역시 혼신의 힘을 다해 영화라는 하나의 그림을 그려낸다.

그런 ‘작품’에 어찌 고뇌가 없겠고, 사상이 없겠나. 이 단순한 진실을 나는 언제부터 회피해 온걸까. 왜 난 지금껏 책을 읽을 때 으레 그랬듯이 치열한 관심과 질문을 영화에는 던져오지 않았던걸까. 독자(관객)로서 던지는 이 치열한 관심과 질문 없이 읽은 책과 영화는 결과론적으로 읽지 않은 것과 진배없다. 아니, 건성으로 읽어놓고 엉터리 감상평을 여기저기 지껄이고 다닌다는 점에서 차라리 읽지 않은 만 못하다. 결국 그 무수한 영화들과 그에 들인 무수한 시간들을 난 낭비해 온 게 된다. 업보다. 업보.

이 책은 영화학과 철학 두 학문을 모두 전공한 이왕주 박사의 영화 해설서다. 하지만 대중에게 낮선 철학 개념들을 먼저 소상히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 철학 입문서라고 칭할 수도 있겠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고사가 떠다녔다.

옛 중국에 한 소 도살꾼 있었다. 막 죽인 소를 서슬퍼런 칼 하나로 순식간에 뼈와 살로 분리해내는 모습이 가히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더란다. 그 도살꾼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처음 뼈와 살을 분리할때는 무턱대고 뼈 옆에 칼을 대고 힘으로 썰어 나갔습니다. 자연히 힘은 지금보다 두배, 세배로 들었고 칼은 하루를 멀다하고 무뎌졌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연륜이 쌓이자 어느 부분에 칼을 대고 밀어내야 힘 들이지 않고 살을 분리해 낼 수 있는지 훤히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지점에 칼을 갖다 대기만해도 살은 자연히 분리되며, 칼은 몇 년을 써도 무뎌질 줄은 모릅니다.’

  철학이라는 메스를 들고 영화를 거칠 것 없이 해부하고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지은이의 글은, 그렇게 날 부끄럽게 했다. 어줍잖은 객기를 참지 못해 나는 시쳇말로 나 꼴리는 대로 영화를 난도질해 왔으면서 칼이 무뎌진다, 순 뼈뿐이고 먹을 살은 없다며 투덜거려 온 건 아니었을까.

'포스트모더니즘은 아무튼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려면 내숭이나 떨며 정해진 시나리오에 따라 얌전히 처신하기보다는 때로는 난폭하고 무례할 정도로 제도나 규칙의 틀안에 있는 모든 것들에 저항해 볼 이유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본문 25P

‘그[슈렉을 말함 - 필자)는 ’바깥‘의 방식으로 행동한다. 그는 선한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단순하면서도 이기적인 땅주인이다. 그가 저 가소로운 동화의 성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도 단지 동화의 주인공 무리들을 내몰고 땅을 되찾기 위해서다. 목숨을 걸고 공주를 구하러 악마의 성으로 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악마를 징벌하려는 의도는 눈꼽만큼도 없다. 단지 늪지를 확실하게 되돌려 받으려면 그 임무를 떠맡는 게 최선이기에 그런 것 뿐이다.’
- 본문 30P

'그렇다면 물어보자. 왜 위반해야 하는가. 포스트모더니즘은 왜 끝없이 위반을 부추기는가. 답은 간단하다.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다,‘
- 본문 34P

영화 ‘슈렉’에 대한 일련의 해석들이다.
이 영화가 이토록 내가 지금껏 추구해 온 가치와 개념들을 구현해 내고 있는 영화였던가. 근데 대체 자칭 철학도라 으스대는 나는 왜 감독의 의도를 읽어내긴 커녕 진흙 목욕하는 슈렉의 모습만 흉하다고 생각하며 이 영화를 낭비했던가.

‘철학은 만학의 여왕’이라는 말도 어느덧 넌센스, 혹은 저 먼 옛날 강성했던 철학의 위세를 기리는 슬픈 기념가로 밖에 들리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비주류의 대명사로 전락한 학문의 끈을 놓지 않고 철학을 이런저런 트렌드와 융합시켜 다시금 인간을 읽어 내려는 노력을 볼 때마다 사뭇 감동스러워 지는 심정을 숨기고 싶진 않다.

유익했고, 반성적이고, 다소 개인적으로는 감동적이기까지한, 한 마디로 잘 쓴 책이었다.

  





      
정언
01.12. 01:03 삭제
후기를 참 잘썼네요. 여긴 모두가 다 잘 쓰는 가족이지만요.
철학을 잘 모르는 나도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동생이 올린 책 후기에 부러움만 쏟아내고 왔는데
산골청년도 정말 대단하네요.
하늘마음
04.03. 03:51  
정언님,

아들이 군인이라서 이거 답글을 안올리네요.
이제는 둘 다 철학을 하게 되어 시너지 효과가 많이 있겠지요.

이런 응원 아이들에게 좋은 힘이 될 것으로 압니다.
고맙습니다.
자주 마실오세요.

배 소피아
ddfiem13
10.12. 12:59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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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fiem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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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fiem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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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fiem13
10.24. 10:15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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