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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찾아서> - 성석제
산골청년
[2014-01-22 0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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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찾아서> - 성석제

정치학과 사회 심리학, 현대 시문학, 전근대 철학사, TEPS 기출 어휘 총정리집...
이등병 때 처음 부대 도서관에 꽂혀있는 개론서들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전역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군에서 지내는 2년여 간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유의미하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이 매분 매초 내 머릿속을 갉아 먹던 시절이었다.
이 책들과 함께라면 이 결코 짧지 않은 유배 생활도 조금은 긍정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진정 순수했고, 그래서 더 가슴 아린, 초심자다운 발상이었다.

당연히 미친 듯이 읽었다. 본래 전공인 인문학은 물론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 손에 잡히는 건 뭐든 독파해 나갔다.
한번 잡은 책은 취침 시간 후에 화장실 변기 위에서라도 다 읽어야만 직성이 풀렸으며, 읽으면서 인상 깊은 문장들은 모조리 페이지를 메모해 두었다가 주말을 이용해 전부 손으로 필사(筆寫)했다.

그렇게 읽어 넘긴 책들이 100권을 넘었고, 필사 노트는 4권에 달한다. 지금도 가끔은 그때처럼 치열한 순간들이 모인 하루가 다시 올까하는 어딘가 서글픈 의구심을 품곤 한다.

헌데 이토록 치열한 하루하루가 모여 일주일이 되고 다시 한 달이 되는, 지극히 청춘다운 나날들에도 장애물은 있었으니, 그건 군 간부도, 선임도 아닌 ‘권태(倦怠)’라는 복병이었다.

모든 선임들이 오침(午寢) 중인 주말 오전.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에 겨우 의지해 홀로 책 구절을 필사하고 있으면 느닷없이 뭐라 형언키 힘든 권태의 쓰나미가 기습해 오곤 했다.

그 어떤 징후도, 이유도 없다.
일순간 두 팔과 다리에 힘이 순식간에 증발하며 축 늘어져 버린다.
지금껏 나를 지켜주던 방패인양 꼭 쥐고 있던 볼펜마저 아그작 아그작 씹어 삼킨 후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싶어진다.

지금껏 의미랍시고 꼭 부여잡은 채 아등바등 끌고 온 모든 사고와 행위들을 한순간 폐기해 버리고픈 강렬한 욕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신분 상승을 원하는 현대인들이 종종 느끼곤 하는 이 감정을 ‘현기증’이라 정의하기도 했다.

물론 위에 나열된 행동들이 생활관 막내에게 허락될 만큼 군대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진 않았다. 적어도 나 이등병 때까진 말이다.

이 ‘권태로운 현기증’이 구토처럼 치밀어 오를 때마다 나는 조용히 부대 도서관을 찾곤 했다.
말이 도서관이지 책 꽂힌 서가 몇 개가 다인 그 공간에서 나는 저번 주말에 읽었던 성석제의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성석제를 읽을 때면, 요새 TV에서 부지런히 들먹이는 힐링이란 단어와 가장 유사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책에서 그 무엇도 요구하거나 가르치려들지 않았다. 그저 이야기를,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이야기를 정성껏 들려줄 뿐이었다.

미래를 준비해야 한단 중압감도, 유배와 있다는 분노와 서러움도 모두 잊고 이 경이로운 이야기꾼이 풀어내는 이야기에 몸과 정신을 완전히 내맡겨 버리는 것. 그것이 벽돌 한 장짜리 이등병에게 허락된 위로의 최대치였다.

두어 시간의 이야기를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읽은 후 침대로 가 짧은 오침을 취하고 나면 나의 사지는 언제 무력했냐는 듯 생생한 힘이 가득 들어차 있곤 했다.

<왕을 찾아서>는 그 중에서도 단연 성석제다운 특징이 두드러지는 작품이었다.
유년 시절 주인공 가슴 속의 영원한 영주이자 왕이었던 남자 ‘마사오’의 부음을 전해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마사오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지역’에서의 추억들과 성장담이 연륜 있는 문장으로 맛나게 버무려 지는 한 꼭지의 회고록이다.

‘마사오, 이제 나는 그를 만나러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차려진 빈소로 간다.’
                                                                                                                                                      -10P

‘마사오는 정식으로 조직을 만들지 않았다. 그는 혼자 힘으로 떠오른 해였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 줄망정 다른 사람의 힘을 긁어모아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은 없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사오는 왕초도 두목도 대장도 아니었다. 그냥 마사오였다.’

‘그는 한 때 지역의 왕이었다. 그때가 좋았든 나빴든 왕으로 군림 했다는 사실 때문에 피지배자들에게 빚을 졌다. (...) 마사오가 지역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패배와 죽음뿐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러나 그는 빚을 졌다. 개인적인 목숨과 영예와 평온쯤은 내놓아야 했다. 그것들이 비록 얼마 남지 않았고, 얼마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318P

'그날 나는 하루 종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앓았다. 그날 나는 내 마음속의 영원한 왕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316P

성석제와 이 멋진 이야기 한 편이 내게 무엇을 남겼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아마 끝끝내 대답하지 못하리라.
비전? 의지? 인생을 관통하는 명언? 그런 것을 바라고 성석제를 읽기 시작한다면 애초에 헛된 노력을 하고 있는 거라고 말해 주고 싶다.

내가 읽은 그의 책들 중 그런 건 결국 없거나 모두 알고 있는 내용들일 뿐이었다.
내 생각에 성석제 문학의 힘은 계도적인 무엇이 아닌, 그저 정성껏 차린 엄마의 한 끼 식사 같은 것이 아닐까.

아무리 세상이 지랄 맞아도, 아무리 억울해도, 기진해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아도 한 술 두 술 씹어 넘기고 나면 어느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온 전신에 퍼져 있는 것. 바로 그것이 성석제와 성석제 문학이 갖는 진정한 힘이리라 믿는다.

글의 마지막 피날레를 고민하며 필사노트를 뒤적거리다가 참 성석제다운 문장 한 줄이 눈에 띄어 이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굿바이!

‘남자 아이에게 물어보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같은 또래 예쁜 여자 아이의 짜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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